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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야기/성경사건

예수님의 눈물

[권혁승 칼럼] 예수께서 흘리신 세 종류 눈물

김진영 기자   jykim@chtoday.co.kr   |   입력 : 2014.02.26 21:39
 

권혁승 교수의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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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승 교수.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1-42)

 
예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비교적 짧은 생애이긴 하지만 정말 예수께서는 한 번도 웃으신 적이 없으셨을까? 저녁 해가 넘어가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시면서 제자들과 정답게 둘러앉아 웃음 섞인 환담을 나눌 기회조차도 전혀 없으셨을까? 당시의 상황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위기와 파탄에 빠져 있었던 시기임을 고려해 본다면, 정말로 웃을 수 있는 기분이나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겠다.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예수께서 적어도 세 번 우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 우셨던 것이 모두 감람산을 중심으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제일 먼저 우신 것은 베다니의 나사로 무덤 앞에서였다(요 11:35).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우는 것과 또한 그녀와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흘리신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병 앞에서 힘없이 쓰러진 나약한 한 친구 나사로를 향한 연민의 정과 더불어, 오빠를 잃은 두 자매의 억제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함께 그 고통을 나누는 예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휴머니즘 자체가 신앙일 수는 없다. 그러나 신앙은 휴머니즘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야보고서에서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5:13)고 하였다. 고난당하는 욥을 찾아온 세 명의 친구들은 울며 각자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말도 없이 땅에 앉아 마주보고 지냈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함께 그런 슬픔을 나누는 신앙의 휴머니즘을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우신 두 번째 경우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우신 것이다. 이 눈물은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을 향한 눈물로서 자기 민족을 향한 뜨거운 애국심이 담겨있는 눈물이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갈릴리를 출발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라고 한탄하셨다. 예수님의 성육신하심은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고, 그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고국이요 사랑하는 동족이다.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흘리는 예수의 눈물 속에는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애국심이 담겨 있다.
 
애국심 자체가 신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안에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나라와 나라의 국경을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다(행 17:26). 이것은 자신이 태어난 각자의 조국이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도 모두가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분들이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모세는 금송아지를 섬김으로 무서운 죄를 범한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용서를 기도하였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신을 생명책에서 제하여 줄 것까지 요구하였다(출 32:32).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구원까지도 포기할 수 있다는 뜨거운 애국심의 기도였다. 바울 역시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위한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음을 고백하였다(롬 9:1-2). 바울은 자신의 골육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민족의 구원을 원한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우신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였다. 복음서에서는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같은 상황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고 묘사하고 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의 마지막 기도 속에는 심한 통곡과 눈물이 담겨 있었다. 이 기도 속에서 예수가 보여준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담 이후 죄악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의 절망적인 운명 앞에서 흘린 눈물, 곧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 눈물이었다. 이 눈물 속에는 인류의 절망적 운명을 뒤바꾸어 놓게 될 십자가의 복음이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그 눈물은 절망이기보다 오히려 인류 구원의 감격이 담겨 있는 눈물이다. 눈물의 기도 속에서 예수께서 선택한 십자가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넓은 길을 열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지금 우리도 예수께서 흘린 눈물이 필요하다. 지금은 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엄청난 피해에 원전사고의 재앙이 겹친 이웃나라 일본을 위하여 함께 눈물을 흘릴 때이다. 자연재해 앞에 힘없이 무너진 과학과 경제의 오만함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영적 각성의 기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위하여 어느 때보다 뜨겁게 기도할 때이다. 무엇보다도 통일시대를 내다보며 북한을 위하여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모두가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대통령의 심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며 조국을 위하여 기도할 수는 있다. 이런 눈물의 기도가 가능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동산에서 우리를 위하여 심한 통곡과 눈물로 친히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구약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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